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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독후 2022. 9. 23. 13:21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안녕하세요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적어봅니다.

    이 책은 즐겨보는 블로거 분의 추천으로 사르트르의 저작을 한 번쯤은 읽어 보아야 생각했던지라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1965년 9월과 10월에 도쿄와 쿄토에서 세 차례 행해진 사르트르의 강연을 담은 것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강연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삼일에 거친 강연을 담아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지식인이라 무엇이며 그 기능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셋째 날에는 앞의 내용과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작가란 무엇이며 작가는 지식인인가에 대하여 판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둘째 날까지는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겠으나 셋째 날은 읽기가 좀 벅찼습니다,,
    본 저를 읽기에 앞서 우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너무 많이 알 필요는 없고 간단하게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그렇지 못한 채 부르주아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두 계급 사이에 부르주아처럼 생활하며 그들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지만 부르주아로서는 모자란, 전문화된 지식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프티부르주아라는 계급이 있습니다. (서술의 편의상 앞으로 부르주아는 자본가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로 적겠습니다.) 이 프티부르주아라는 계급을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사고방식이나 생활은 자본가인데 위의 두 계급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무산계급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이죠. 사르트르는 이러한 모순에서 프티부르주아가 지식인이 될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자본가들은 프티부르주아를 노동자로서 한낱 도구로 이용하지만 노동자들은 근본적으로 프티부르주아와 동일한 목표를 가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프티부르주아는 자신은 물론 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합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며 노동자들을 위한 목표를 제시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제시하며 더 나아가 노동계급 내의 유기적인 지식인을 만들어내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죠. 그렇게 함으로써 프티부르주아는 지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지식인일까요? 사르트르는 작가는 작가라는 직업 자체에서 프티부르주아가 계급 구조상 가진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우연히 지식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라 합니다. 작가라는 직업 자체에서 가진 모순이 무엇이냐 하신다면 저도 대답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아직 셋째 날 강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직접 읽어 보시고 저한테 도움을 좀 주셨으면 좋겠네요.
    여러분은 사르트르의 지식인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과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프티부르주아가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자본가 계급으로의 이동과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이라는 선택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아마 대부분은 자본가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6.25 전쟁에서 북한을 옹호한 사르트르처럼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사람이나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꼭 완전히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프티부르주아든 자본가이든 노동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그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해준다면 세상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나중에 다시 읽어볼 만한 부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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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지식을 가진 모든 전문가는 잠재적인 지식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보편주의적 기술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 속에서 항구적으로 싸운다고 하라 때의 바로 그 싸움, 즉 모순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전문가가 실제적인 지식인이 되는 것은 결코 단순한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문가를 특정짓는 긴장을 전문가 자신으로부터 떼어 드러낼 수 있었던 바로 그 전문가의 개인적인 역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입니다. 요컨대 지식인으로의 변화를 성취하는 요인들의 총체는 사회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분열된 사회의 산물인 지식인은 그가 이처럼 사회의 분열을 자신 속에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열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인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사회의 지식인에 대해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오로지 그 사회가 만들어낸 지식인만을 갖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의 사유는 끊임없이 사유 그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사유는 이 되돌아봄을 통해서 언제나 사유 그 자신을 특이한 보편성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계급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이미 보편적인 것을 획득 했다고 스스로 믿는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의 사유는 바로 이 되돌아봄을 통해서 사유 그 자신을 이 계급의 편견에 의해 은밀하게 특이화된 보편성으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적 사유와 반대로 지식인은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지식인은 자신이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바깥으로부터-또한 그 역의 방향으로도-인간을 만들어가야 할 존재로서 파악해야 합니다.

    (전략)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판단하기 위해 사회 바깥에 관념적으로 자리 잡으려고 시도한다면 잘해봤자 그는 자신의 모순을 자기 자신과 함께 사회 바깥으로 가지고 나간 꼴이 되고 말 것이며, 잘못하면 (경제적) 중간계급 위에 군림하면서 중간계급을 내려다보는 그 거대한 부르주아지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이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은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대중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우상을 무너뜨리는 일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지식인은,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급진적이 되어 혁명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식인의 새로운 과업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전략) 모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제약을 통합의 방식으로 초월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따라서 자기의 관점에 타인을 집요하게 끌어들이려 하지 않고 두 논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양쪽 모두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창조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변증법적 합의를 정립하고 유지하며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인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대리인이며, 그는 자신의 주된 모순(그의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와 그의 계급에서 비롯된 특수주의가 일으키는 모순)으로 인해서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의 보편화를 지향하는 운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이 지식인의 것이 아닌 목표, 따라서 지식인으로서는 평가할 권리도 없는 그런 특수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식인을 도구의 수준으로 전락시킨다면, 반면에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은 지식인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목표를 갖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출발점에서부터 이의를 제기하는 자, 따라서 잠재적인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지식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반성적인 의식을 취하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지식인은 (중략) 오늘 이 순간 사회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의 사회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식인의 무지의 정도는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를 결정하는 최소한의 무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식인은 무오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지식인은 자주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지식인의 오류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오류인 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의 고유 속성으로 남을 최소한의 오류입니다.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지식인 자신의 모순 속에서 사는 일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급진주의를 통해(즉 진리의 기술을 환상과 거짓에 적용함으로써) 지식인 자신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지식인은 이처럼 그 자신이 지닌 모순 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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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합니다. 작가는 공통의 언어의 수호자이지만, 그는 글쟁이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며, 또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비-기표로서의 언어 또는 정보 왜곡으로서의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의미 작용과 비-기표를 수단으로 취하면서, 단어의 물질성에 의거하는 작업을 통해 그 어떤 언어 대상을 생산하는 장인인 것입니다.

    공통의 언어는 그의 물질성 또는 물질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실제적으로는 정보 왜곡의 언어이다. 따라서 공통의 언어에서의 명명은 한편으로 보면 기의를 현존케 하는 일이 분명하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보면 기의를 사장시키는 일, 기의를 언어 집단 속에 파묻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통의 언어에서 이렇게 기의가 사장되어버릴 경우, 기의에 대응하는 기표 또한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기표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만 기표일 뿐, 실제로는 비-기표이다. 또 기표가 비-기표가 되고 기의가 사장되어버린 이상, 다시 말해 의미 작용이 사라진 이상, 전달될 지식 또한 있을 수가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침묵만이 흐른다. -주-


    글을 쓰는 것이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적 대상은 언어를 넘어선 소통과 같은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비록 단어들에 의해서 생산되었지만 다시 단어들에서 의해서 닫혀진,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침묵을 통해서 문학적 대상은 언어를 넘어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적 이야기입니다”라는 말은 곧 “당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하여 말을 합니다”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세계는 출생이라고 하는 그 흔한 특이성을 통해서 나를 그 어떤 유일한 모험 속에 밀어 넣으면서 나를 생산합니다.

    작가의 글은 특이한 보편이라고 하는 유형 그 자체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글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다음과 같은 상호 보완적인 두 측면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글의 존재가 갖게 되는 역사적 특이성이라는 한 측면과 그 글의 목표가 갖게 되는 역사적 특이성이라는 한 측면과 그 글의 목표가 갖게 되는 보편성이라는 또 다른 한 측면-또는 그 역도 가능합니다-이 그것입니다. 한 권의 책,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세계의 한 부분을 가로질러서 세계의 전체성이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가는 단지 세계-내-존재를 암시적으로 제안하는 애매한 대상을 생산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세계-내-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독자가 작가와 갖는 진정한 관계는 비-지식으로 남는 것입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 보편적인 특이함이라고 하는 독자 고유의 실재성으로 되돌려 보내져야만 합니다. 즉 독자는-한편으로 보면 그가 책 속에 들어가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가 책 속에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독자 자신을 동일한 전체의 또 다른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의 또 다른 한 포착으로서 실현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대 작가가 하는 본질적인 일은 공통의 언어의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요소를 가지고서 작업을 하는 것이며, 이 작업을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어떤 한 특이한 보편이 보여주는 세계-내-존재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작가의 이 본질적인 일을 의미의 탐구라고 부르기를 제안합니다.

    오늘날의 문학작품은 세계가 새안한 어떤 한 특이한 부분을 매개로 삼아서 세계가 세계 자신에게 하는 폭로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특이성을 발생시키는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을 도처에서 제시하게 되며, 또 역으로 보편적인 것의 굴절과 비가시적인 경계로서의 특이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객관성은 매 페이지마다 주관적인 것의 근본적인 구조로서 밝혀져야 하며, 역으로 주관성은 그 어디에서나 객관적인 것의 침투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탐지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작가의 참여는 공통의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 왜곡의 부분을 활용함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것을 소통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또 작가의 참여는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전체성과 전체화 사이에서, 세계와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내-존재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이처럼 작가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성과 보편적인 것의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식인은 자신의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적 요구와 지배계급에서 비롯된 특수주의적 요구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자신의 기능이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작가는 자신의 내적인 과업 속에서, 지평선상에서 삶을 확인하는 보편화를 암시해가면서 그 자신이 직접 체험의 차원 위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처럼 우연히 지식인이 된 게 아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지식인인 것입니다. 작품 그 자체가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벗어나서 이미 다른 지식인이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실천-이론적 차원 위로 옮겨 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작품은 우리를 짓누르는 세계 내에서 존재를-비-지식의 차원 위에서-복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품은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삶을 체험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자 다른 모든 자유에 호소하는 그 어떤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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